한국재난안전뉴스 박광춘 기자 |
대형 재난과 산업재해, 사회적 참사에 대한 국가와 기업의 책임을 제도화하는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안이 국회 상임위원회 문턱을 넘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반복적으로 제기돼 온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국가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라는 질문이 법률 체계 안으로 들어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지난 29일 전체회의를 열고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안을 의결했다. 표결 과정에서는 국민의힘 주호영 의원이 반대 의견을 냈다. 이 법안은 이재명 정부의 123대 국정과제 중 하나로, 2020년 처음 발의됐지만 21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22대 국회에서는 범여권 의원 77명이 공동으로 다시 제출했다.
이번 법안의 핵심은 ‘안전권’의 명문화다. 누구나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점을 법률에 담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이를 보장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하도록 했다. 그동안 재난 대응은 사고가 발생한 뒤 수습과 보상에 초점이 맞춰지는 경우가 많았다. 생명안전기본법은 예방, 대비, 대응, 복구, 피해자 보호까지 아우르는 기본 틀을 만들겠다는 취지다.
법안은 정부가 5년마다 국가 차원의 안전권 보장 종합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또 국제 기준 등을 반영해 안전관리 기준을 마련하고, 이를 공표·평가하도록 했다. 안전 정책이 부처별로 흩어져 단기 대응에 머물지 않도록 국가 차원의 장기 계획과 기준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대통령 소속 국민생명안전정책위원회 설치도 핵심 내용 중 하나다. 이 위원회는 주요 안전 정책을 심의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맡는다. 대형 재난이나 산업재해처럼 여러 부처와 기관이 얽힌 사안에서 정책 조율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의미다.
독립 조사 기능도 새로 담겼다. 법안은 국무총리 소속 국가안전사고조사위원회를 설치해 안전사고가 발생했을 때 원인과 대응 과정을 독립적으로 조사할 수 있도록 했다. 사고 수습 기관과 조사 기관이 분리돼야 한다는 요구는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 대형 참사 이후 꾸준히 제기돼 왔다. 사고의 직접 원인뿐 아니라 구조적 문제, 대응 과정의 적절성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 셈이다.
피해자 보호 조항도 눈에 띈다. 법안은 참사 피해자의 치유와 보호를 위한 법적 근거를 담았다. 피해자가 구조와 지원을 받을 권리, 사고의 예방·대비·대응·복구 과정에서 필요한 정보를 제공받고 참여할 권리, 인도적 처우를 받을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방향이다. 이는 재난 피해자를 단순한 보상 대상이 아니라 권리를 가진 주체로 보겠다는 변화로 풀이된다.
지방자치단체의 역할도 확대될 전망이다. 지자체는 지역의 안전 수준을 진단하고 취약성을 조사·분석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갖게 되는데, 지역별 재난 위험이 서로 다른 만큼, 중앙정부의 일괄 대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위험 지역, 노후 산업단지, 다중이용시설, 취약계층 밀집 지역 등 지역 특성에 맞춘 안전 정책 수립이 더 중요해질 전망이다.
기업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법안이 최종 통과돼 시행되면 대형 재난이나 산업재해와 관련한 기업의 예방 책임과 안전관리 의무가 더 분명해질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안전관리 기준을 설정하고 평가하는 구조가 마련되면 기업은 시설·작업환경·위험관리 체계를 더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특히 산업재해 위험이 큰 업종에서는 안전 투자와 사고 예방 시스템 구축이 경영의 주요 과제로 부상할 수 있다.
다만 법안을 둘러싼 쟁점도 남아 있다. 야당인 국민의힘은 입법 취지 자체에는 공감하면서도 피해자의 범위가 넓고 법적 개념이 불명확하다는 점을 문제로 제기했다. 국민의힘 소속 행안위원들은 회의 산회 뒤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 안전을 위한 법일수록 법리적 허점과 행정적 혼선은 줄여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조사위원회 조사 범위가 소급 적용돼 정략적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었으나 소급 적용은 교섭단체 간 합의가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게 했다”며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사 범위와 피해자 지원 대상, 기존 법률과의 관계 등은 향후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 논의 과정에서도 쟁점이 될 수 있다.
생명안전기본법은 단일 사고에 대한 특별법이 아니라 재난과 참사를 다루는 국가의 기본 원칙을 정하는 법이다. 따라서 상징성은 크지만, 실제 효과는 시행령과 하위 제도, 예산, 조사위원회의 독립성, 지자체와 기업의 이행력에 달려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법률 문구가 현장의 안전으로 이어지려면 계획 수립에 그치지 않고 점검, 평가, 공개, 개선이 반복되는 구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법안의 의미는 ‘안전은 행정 서비스가 아니라 국민의 권리’라는 관점을 제도화했다는 데 있다. 참사가 발생한 뒤 책임을 따지는 방식에서 벗어나, 사고를 미리 막고 피해자를 끝까지 보호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생명안전기본법이 본회의까지 통과하면 한국의 재난안전 정책은 사후 수습 중심에서 권리 기반의 예방·책임 중심 체계로 한 단계 이동하게 된다.
안전 전문가들은 "법이 만들어진 것은 어느 것보다 환영할 일이지만, 결국 실제적으로 시행이 어떻게 되는지가 핵심인 만큼, 향후 시행령 등이 실제 상황에 맞게 만들어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