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재난안전뉴스 이계홍 기자 |
전기차 한 대가 불이 났다. 소방관들이 물을 뿌리고 또 뿌린다. 불길은 잠잠해지는 듯하다가 다시 살아난다. 겉으로는 불이 꺼진 것처럼 보여도 차량 아래쪽에서는 여전히 뜨거운 열이 남아 있다. 전기차 화재가 일반 자동차 화재와 다른 이유다.
2024년 8월 인천 청라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발생한 전기차 화재는 이 같은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불은 차량 한 대에서 시작됐지만 곧바로 주변 차량으로 번졌고, 지하주차장이라는 밀폐된 공간은 진화와 배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불길은 8시간 만에 잡혔고 무려 차량 140대가 불에 탔다.
전기차 보급이 늘면서 소방당국도 대응법을 바꾸고 있다. 소방청 국립소방연구원은 2025년 전기차 화재 대응 지침서를 개정해 전기 트럭 등 상용차와 고위험 화재, 특수 진압장비를 포함한 현장 대응법을 새로 담았다.
◇불씨는 배터리 안에서 시작된다
전기차의 핵심은 차 밑에 깔려 있는 고전압 배터리팩이다. 수백~수천 개의 배터리 셀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에너지 저장장치를 이룬다.
이 장치는 평상시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충돌이나 제조상의 결함, 내부 단락, 과열 등으로 배터리 셀 내부에 이상이 발생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처음에는 특정 셀의 온도가 올라간다. 온도가 일정 수준을 넘으면 배터리 내부에서 연쇄적인 화학반응이 일어나면서 더 많은 열이 발생한다. 이른바 열폭주(Thermal Runaway)다.
문제는 열폭주가 한 셀에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옆에 있는 셀로 열이 전달되면 또 다른 셀이 열폭주를 일으키고, 다시 주변으로 번진다. 수백 개의 셀이 촘촘하게 들어 있는 배터리팩에서는 일종의 도미노 현상이 벌어진다.
서울대 화학부 임종우 교수 연구팀은 배터리 열폭주 과정에서 음극과 양극 사이의 자가증폭 반응이 열폭주를 급격하게 악화시키는 핵심 메커니즘을 규명한 바 있다.
결국 소방관 입장에서는 눈앞의 불꽃만 잡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배터리 내부에서 아직 진행되고 있는 열폭주를 어떻게 멈추느냐가 더 어려운 문제다.
◇“불이 꺼졌다고 끝난 게 아니다”
전기차 화재 현장에서 소방관들이 가장 긴장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진화 이후다. 불꽃이 사라졌더라도 배터리 내부에 열이 남아 있으면 다시 발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배터리팩은 자동차 하부에 위치해 있어 외부에서 내부 상태를 직접 확인하기 어렵다. 소방관들이 차량 밑으로 진입하거나 특수장비를 이용해 배터리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
소방청은 전기차 화재에 대응하기 위해 무인파괴방수차 같은 장비도 확대하고 있다. 이 장비는 소방관이 직접 화염에 접근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원격으로 차량 등에 방수할 수 있다. 최대 20m 높이와 반경 10m 범위에서 작업이 가능하며, 4mm 두께의 철판과 160mm 두께의 콘크리트 블록을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성능을 갖추고 있다. 소방청은 2025년 말까지 전국 시·도에 총 32대의 무인파괴방수차를 배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물을 뿌리는 이유는 ‘불’보다 ‘열’ 때문이다
전기차 화재를 두고 흔히 “배터리 화재에는 물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설명이 아니다. 소방 현장에서 물은 중요한 진압 수단이다. 핵심은 물 자체가 아니라 배터리의 온도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낮추느냐다.
열폭주가 진행되면 배터리 내부의 온도가 매우 높아진다. 따라서 주변 셀로 열이 전달되는 것을 막고 배터리 전체를 냉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는 배터리팩의 구조다. 겉에서 물을 뿌린다고 해서 물이 배터리 내부의 모든 셀에 효과적으로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상황에 따라 차량 하부에 집중적으로 방수하거나 특수 장비를 활용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
소방청이 개정한 전기차 화재 대응 가이드에도 특수 진압장비 적용 방법과 실제 대응 사례 등이 반영됐다.
◇가장 까다로운 곳은 ‘지하주차장’
전기차 화재가 특히 우려되는 장소가 아파트 지하주차장이다. 지하공간에서는 연기가 빠져나가기 어렵고 소방차가 화재 차량 가까이 접근하기도 쉽지 않다. 차량이 빽빽하게 주차돼 있으면 주변 차량으로 불이 번질 가능성도 커진다.
최근 중앙소방학교가 실시한 복합건축물 화재 대응훈련에서도 지하주차장의 전기차 배터리 열폭주를 가정한 훈련이 이뤄졌다. 배터리 화재가 굴뚝 효과를 통해 상층부로 급격히 확대되는 상황까지 가정했다.
전기차 화재가 단순히 ‘자동차 한 대의 화재’가 아니라 건축물 전체를 위협하는 복합재난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경일대 소방방재학과 이영주 교수는 “전기차 화재와 관련해 배터리의 충격이나 과충전 등 여러 요인을 고려한 예방과 안전관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기차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화재’를 제대로 알아야
그렇다고 전기차 자체를 위험한 자동차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전기차는 이미 빠르게 보급되고 있고 배터리 기술과 화재 안전기술도 함께 발전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전기차가 늘어나는 속도에 맞춰 충전시설과 주차장, 소방시설, 화재 대응체계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기차 화재를 둘러싼 논쟁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전기차는 불이 잘 난다”가 핵심이 아니다. “한번 화재가 발생했을 때 기존 자동차와 다른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배터리는 많은 에너지를 작은 공간에 저장한다. 그것이 전기차를 움직이는 힘이다. 동시에 그 에너지가 통제되지 않을 경우 화재를 키우는 힘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전기차 시대의 안전은 자동차만의 문제가 아니다. 배터리를 이해하고, 배터리 화재에 맞는 소방기술과 시설을 갖추는 것. 그것이 전기차 시대에 우리가 풀어야 할 새로운 안전 과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