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속에서 시작되는 보이지 않는 불…‘트래킹 화재’가 무섭다

7월 압구정 한양아파트 화재 원인, 로봇청소기 아니었다
발코니 확장하며 벽체 공간 속에 콘센트 설치
이 곳에 먼지, 습기 등이 쌓여 트래킹 화재 발생
눈에 보이지 않고 큰 불꽃 발생 안 해

한국재난안전뉴스 박종열 기자 |

지난 7월 21일 오전 10시 27분경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한양아파트 5층 세대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아파트 화재라서 소방차가 36대, 인력 133명 등이 총출동해 화재는 두 시간여 만에 진압됐다. 주민들이 긴급대피하긴 했으나 인명 피해는 없었다.

 

그런데 화재 원인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의문과 가설이 제기돼 아직까지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화재 최초 목격자인 가사도우미는 주방에서 청소 중 이상한 소리가 들려 안방에 가보니 로봇 청소기 부근에 불꽃이 튀며 불이 붙은 상태였다고 말했다. 그의 진술에 따라 로봇청소기 충전기에서 발화했을 가능성이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 보였다.

 

그런데 두 달여간의 소방당국 조사 결과 화재 원인은 청소기 발화가 아니라 벽체 공간 콘센트에서 발생한 ‘트래킹’인 것으로 확인됐다. 2일 더불어민주당 이상식 의원실이 소방청으로부터 제공받은 화재원인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소방당국은 발화 원인을 ‘트래킹에 의한 단락’으로 최종 판단했다.

 

◇벽 속의 습기·먼지 쌓인 전기설비가 트래킹 화근

 

화재는 흔히 전기제품의 과열이나 가스레인지, 담배꽁초처럼 눈에 보이는 곳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불이 난 장소와 실제 발화 지점이 다른 경우도 적지 않다.

 

한양아파트 화재를 일으킨 트래킹이 대표적이다. 트래킹(tracking)이란 전기설비의 절연물 표면에 먼지나 습기 등 이물질이 쌓이면서 미세한 전류가 흘러 표면에 탄화된 전기 통로가 만들어지고, 결국 불꽃과 열이 발생하는 현상이다. 쉽게 말해 전기가 흘러서는 안 되는 곳으로 조금씩 새어 흐르다가 불이 붙는 것이다.

 

 

트래킹 의심 지점은 건축설비나 각종 배관이 각 층을 거쳐 수직 통과하는 벽체 공간이었다. 서울시 소방재난본부 화재감정연구센터는 이 공간 내부에 있던 노출형 콘센트를 분석한 끝에 인입·접지 단자에 트래킹이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 정황을 확인했다고 감정했다.

 

트래킹은 일반적인 전기 합선과 달리 처음부터 큰 불꽃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절연물 표면에 미세한 누설전류가 반복적으로 흐르면서 표면이 조금씩 탄화되고, 탄화된 부분은 다시 전기가 잘 통하는 길이 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전류가 더욱 많이 흐르고 열이 축적되면서 결국 화재로 이어질 수 있다.

 

압구정 한양아파트 화재에서는 이런 위험 조건이 한꺼번에 겹쳤다. 발코니 확장 과정에서 기존 배관과 전기배선 등을 가리기 위해 가벽을 설치하면서 벽체 내부에 폐쇄적인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 안에 콘센트가 설치됐고, 주변에는 우수관이 있었다.

 

장맛비가 이어지면서 우수관 주변에 습기와 결로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졌고, 폐쇄된 공간에는 분진과 이물질이 쌓일 수 있었다. 소방 조사팀은 우수관 주변의 습기·결로와 공간 내부의 분진·이물질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콘센트 절연물 표면에 누설전류가 발생하고 트래킹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더 위험한 것은 불이 난 곳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벽체 내부에서 시작된 불은 외부에서는 쉽게 발견하기 어렵다. 벽 속에서 전선이나 콘센트 주변이 서서히 가열되면서 목재나 단열재 등 주변 가연물로 불이 옮겨붙은 뒤에야 연기나 냄새가 나타날 수 있다. 그만큼 화재 발견이 늦어지는 것이다.

 

 

해당 호실은 발코니를 확장해 안방과 거실 등을 넓히는 과정에서 발코니 쪽에 있다가 실내로 들어오게 된 우수관·전기배선 등을 가리려고 가벽을 세우면서 벽체 공간이 폐쇄적으로 형성됐다고 소방 조사팀은 밝혔다. 발화 지점인 콘센트도 인터넷 모뎀이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벽체 공간 안쪽으로 설치됐다.

 

◇오래된 아파트만의 문제는 아니다

 

트래킹 화재를 단순히 오래된 아파트에서 발생하는 문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축 주택에서도 전기설비가 습기가 많은 곳에 설치되거나 먼지가 쌓이고 통풍이 제대로 되지 않는 환경이 만들어지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주의해야 할 곳은 △베란다와 발코니 주변 △세탁기·건조기 주변 △싱크대 하부 △욕실 인접 공간 △에어컨 배관 주변 △배관과 전선이 함께 지나가는 공간 △가벽이나 수납장 내부 등이다.

 

인테리어 공사 때도 주의가 필요하다. 공간을 깔끔하게 만들기 위해 전선과 콘센트를 가벽이나 수납장 안으로 숨기는 경우가 있는데, 전기설비를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과 안전하게 만드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특히 콘센트와 배선을 습기가 발생하는 배관 주변이나 밀폐된 공간에 무리하게 설치해서는 안 된다. 인테리어 과정에서 기존 전기배선을 임의로 옮기거나 연결부위를 가려버리는 것도 피해야 한다.

 

◇트래킹 사전 징후 지나치지 말아야

 

트래킹은 갑자기 큰 불꽃으로 나타나기 전에 이상 징후를 보일 수 있다. 콘센트나 플러그 주변에서 “지지직” 하는 소리가 나거나, 타는 냄새가 반복적으로 나고, 콘센트가 변색되거나 열이 나는 경우다. 플러그를 꽂았을 때 불꽃이 반복적으로 튀거나 전기제품의 전원이 간헐적으로 끊기는 것도 점검이 필요한 신호다.

 

이런 증상이 나타나면 단순히 플러그를 뺐다가 다시 꽂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해당 회로의 전원을 차단하고 전기 전문가에게 콘센트와 배선 상태를 점검받는 것이 안전하다.

 

트래킹 예방에서 중요한 것은 습기와 먼지를 전기설비 가까이에 방치하지 않는 것이다. 콘센트 주변에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관리하고, 습기가 많은 공간에서는 물기가 전기설비에 닿지 않도록 해야 한다.

 

콘센트에 직접 물을 뿌리거나 젖은 걸레로 닦는 것은 금물이다. 청소가 필요하다면 반드시 전원을 차단한 상태에서 외부의 먼지를 제거해야 한다.

 

또한 멀티탭 하나에 여러 전기제품을 집중적으로 연결하는 것도 피하는 것이 좋다. 과부하와 접촉 불량은 별도의 전기화재 위험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대치동 은마아파트 화재 사고 때도 거주자가 처음 불꽃을 발견한 곳은 식탁 위였다. 하지만 정밀 조사 끝에 천장 내 배선에서 화염이 생긴 뒤 주방에 떨어졌을 개연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번 화재가 보여준 교훈은 분명하다. 화재의 위험은 눈에 보이는 전기제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생활하는 벽과 천장, 가벽 안쪽에도 화재의 불씨가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