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재난안전뉴스 박광춘 기자 |
정상적으로 작동하던 에어컨을 철거하거나 냉매를 다시 충전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불꽃이 튀고 폭발하는 사고가 잇따른 원인이 ‘불법 혼합냉매’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불법 냉매 속 성분이 에어컨 실외기의 알루미늄 부품과 반응하면서 공기만 닿아도 스스로 불이 붙을 수 있는 위험물질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소방당국의 조사에서 처음 확인됐다.
2일 소방청은 온라인과 해외 직구 등을 통해 유통되는 일부 에어컨용 불법 혼합냉매가 실외기 내부에서 자연발화성 물질을 생성해 화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국립소방연구원 등과 공동으로 규명했다고 밝혔다. 정부는 관련 냉매의 수입과 온라인 판매를 차단하기 위해 관계 부처 공동 대응에도 착수했다.
문제의 중심에는 구형 에어컨에 주로 쓰이는 ‘R-22’ 냉매가 있다. R-22는 원래 불에 잘 타지 않는 냉매지만 오존층 파괴 문제로 생산이 단계적으로 중단되면서 가격이 크게 올랐다. 국내에서는 2023년 이후 생산이 중단됐다.
이 틈을 타 값싼 불법 냉매가 시중에 파고든 것으로 소방당국은 보고 있다. 일부 제품은 과거 냉매로 사용됐다가 독성과 가연성 문제로 퇴출된 R-40, 즉 클로로메테인(CH₃Cl)을 다른 냉매와 섞은 뒤 겉면에는 ‘R-22’라고 표시해 판매하는 방식이다. 외관만 봐서는 정품과 구별하기 어렵다.
R-40은 1920~30년대 냉매로 사용됐지만 높은 독성과 불에 잘 타는 성질 때문에 사용이 중단됐으며, 1987년 몬트리올 의정서에 따라 신규 냉매 용도로 사용할 수 없는 물질이다.
냉매 화재 2022년 1건→올해 7월까지 14건
실제 에어컨 냉매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화재도 최근 들어 빠르게 늘고 있다. 소방청이 최근 5년간 관련 화재를 다시 추적한 결과 모두 36건이 확인됐다. 2022년 1건에 불과했던 사고는 2023년 2건, 2024년 6건으로 늘었고 지난해에는 13건으로 급증했다. 올해는 7월까지만 이미 14건이 발생했다.
당초 다른 원인으로 분류됐다가 추가 조사를 통해 냉매 관련 가능성이 다시 제기된 화재도 11건에 달했다. 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한 순간은 에어컨을 철거하거나 냉매를 충전할 때였다. 전체 36건 가운데 17건(47.2%)이 철거·충전 과정에서 발생했다. 에어컨이 작동 중일 때 발생한 화재가 13건(36.1%)이었고, 가동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4건(11.1%)의 화재가 확인됐다.
소방청은 특히 에어컨을 사용하지 않거나 단순 철거하는 과정에서도 불이 나는 이례적인 현상에 주목했다. 국립소방연구원과 서울·경기 화재감정기관, 경남소방본부는 지난달 3일부터 관련 사고에 대한 정밀 분석에 들어갔다. 국가화재정보시스템에 축적된 화재자료와 현장 증거물을 추적한 결과, 화재가 발생한 일부 실외기 내부에서 ‘트리메틸알루미늄’이 검출됐다.
트리메틸알루미늄은 위험물안전관리법상 제3류 위험물이다. 공기와 만나면 스스로 불이 붙을 수 있고, 물과 접촉하면 격렬한 반응을 일으키며 가연성 물질까지 만들어낼 수 있다.
조사 결과 불법 혼합냉매에 포함된 클로로메테인이 실외기 내부의 회전자와 배관 등 알루미늄 부품과 반응하면서 트리메틸알루미늄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확인됐다.
더 큰 문제는 냉매를 처음 주입했을 때는 별다른 이상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에어컨을 가동하는 동안 내부에서 위험물질이 서서히 만들어지고 축적됐다가, 나중에 제품을 철거하거나 냉매를 다시 넣기 위해 배관을 자르는 순간 공기나 수분과 접촉하면서 갑작스럽게 발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용자가 평소 위험을 알아차리기 어려운 이유다.
화재조사관도 두 손에 2도 화상.. 70대 남성도 크게 다쳐
인명피해도 이미 발생했다. 지난 7월 24일 경남 진주의 한 주택 화재 현장에서는 증거물을 수집하던 화재조사관이 실외기 냉매 인입부에서 갑자기 튄 불꽃에 양손 2도 화상을 입었다.
앞서 6월 인천 강화의 한 주택에서는 실외기에 냉매 가스를 충전하던 70대 남성이 폭발로 크게 다쳐 닥터헬기로 이송됐다. 같은 달 전남 목포에서도 냉매 관련 발화 사고가 발생했고, 지난해 4월 서울에서도 유사한 폭발 사고가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불법 혼합냉매 문제는 국내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지난해 12월 캐나다에서도 유사한 불법 혼합냉매가 확인됐다.
국립소방연구원은 화재 원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조사관들이 2차 화재나 폭발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불법 혼합냉매 대응 현장조사 안전 매뉴얼’을 만들어 전국 화재조사관에게 배포키로 했다.
이번 조사는 소방청이 구축해 온 화재조사 빅데이터와 국립소방연구원, 서울·경기 권역별 화재감정기관, 시·도 화재조사관의 현장 분석을 결합해 원인을 규명한 사례이기도 하다. 개별적으로는 원인을 찾기 어려웠던 화재들을 데이터로 묶어 추적하면서 공통 원인을 찾아낸 것이다.
정부, 해외직구·온라인 판매 차단 추진
정부도 불법 냉매의 유통 경로를 차단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소방청과 국립소방연구원, 기후에너지환경부, 산업통상부, 한국소비자원 등은 지난달 14일 1차 관계기관 회의를 열었다. 이어 같은 달 25일에는 한국가스안전공사와 서울·경기 화재감정기관, 경남소방본부까지 참여해 해외 직구와 온라인 판매를 막는 방안을 논의했다.
관계 부처는 앞으로 불법 혼합냉매의 수입 단계부터 온라인 유통까지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고, 필요할 경우 소비자 경보도 발령할 방침이다. 다만 소방청은 에어컨 냉매 자체가 위험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정상적인 통관 절차와 품질 검사를 거친 정품 냉매는 안전하며, 검증되지 않은 경로로 유통되는 지나치게 값싼 혼합냉매가 문제라는 것이다.
소비자도 냉매 충전이나 에어컨 이전·설치 때 주의할 필요가 있다. 시중 가격보다 지나치게 저렴한 냉매를 권하는 업체는 한 번 더 확인하고, 품질 인증 표시가 없는 냉매 용기를 사용하는 업체는 피하는 것이 좋다. 시공은 반드시 정식 등록업체에 맡기고, 사고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시공자의 이름과 연락처 등도 보관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영국 소방청 119대응국장은 “불법 혼합냉매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어 사용자가 위험을 인지하기 어렵다”며 “관계 부처와 함께 화재 발생 현황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추가로 확인되는 사항은 국민 여러분께 신속히 알려드리겠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