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재난안전뉴스 박광춘 기자 |
광복절 연휴 마지막 날인 17일 경남 거제와 통영을 중심으로 기록적인 ‘물폭탄’이 쏟아지면서 산사태가 아파트를 덮쳐 주민이 숨지고, 주택과 도로가 침수되는 등 피해가 속출했다. 통영의 한 섬에서는 산사태에 주민이 매몰됐다가 가까스로 구조됐다. 울산에서도 도로가 잠기고 가로수가 쓰러지는 사고가 이어졌다.
피해는 산업현장으로까지 번졌다. 거제의 양대 조선소인 한화오션과 삼성중공업은 도로 통제와 침수 위험 등을 이유로 휴일 특근 근로자들에게 출근 제한 또는 대기 지침을 내렸다.
불과 사흘 전까지만 해도 남부지방은 심각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었다. 저수지가 말라가고 농업용수 확보에 비상이 걸려 이번 비가 ‘가뭄을 끝낼 단비’가 될 것으로 기대됐다.
실제로 사흘 동안 쏟아진 비로 경남지역의 극심했던 가뭄은 상당 부분 해갈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상상을 뛰어넘는 양의 비가 집중되면서 ‘단비’는 산사태와 침수를 부르는 ‘재난비’로 돌변한 것이다.
17일 기상청과 행정안전부 등 관계당국에 따르면, 거제에 한 시간 124.5㎜.. 54년 관측 역사 새로 썼다
가장 심각한 곳은 거제였다. 17일 오전 1시 32분부터 한 시간 동안 거제에는 무려 124.5㎜의 비가 쏟아졌다. 1972년 1월 거제에서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후 가장 많은 시간당 강수량이다. 종전 기록은 2001년 7월 5일의 96.5㎜였다.
시간당 124.5㎜는 1㎡의 땅에 불과 한 시간 동안 124.5ℓ가 넘는 물이 들이붓는 수준이다.
통영도 시간당 96.7㎜가 내려 관측 이래 시간당 강수량 기록을 새로 썼다. 부산 강서구 가덕도에도 이날 오전 2시 59분부터 한 시간 동안 101.5㎜의 극한호우가 쏟아졌다.
거제의 강수량은 ‘폭우’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였다. 17일 오후 4시 기준 이날 하루 거제 강수량은 633.2㎜에 달해 1972년 관측 시작 이후 하루 강수량 최고 기록을 새로 썼다. 광복절 연휴 사흘 동안 누적 강수량은 800㎜를 넘어섰다. 통영에도 같은 기간 600㎜가 훌쩍 넘는 비가 내렸다.
거제와 통영의 평년 여름 전체 강수량이 각각 935.1㎜와 728.8㎜인 점을 감안하면, 여름 한 철 내릴 비의 90% 안팎이 사흘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집중된 셈이다.
새벽 산사태가 아파트 덮쳤다.. 20대 주민 끝내 사망
엄청난 빗줄기는 결국 인명피해로 이어졌다. 경남소방본부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4시 30분대 거제시 옥포동의 한 주택가 뒤편 비탈면에서 산사태가 발생했다. 산에서 쏟아져 내려온 흙과 돌, 나무가 아래쪽 아파트 1층을 덮쳤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소방구조대가 주민들을 구조했지만, 심정지 상태로 발견된 20대 남성 A씨는 병원으로 옮겨진 뒤 결국 숨졌다. A씨는 삼성중공업 조선소에서 일하는 근로자로 파악됐다. 이 사고로 50대 여성이 팔을 다치는 등 부상자도 발생했다.
단순한 도로나 차량 침수를 넘어 산사태가 사람이 생활하는 아파트 내부까지 덮쳐 사망자가 나온 것이다. 이번 폭우가 얼마나 위험한 수준까지 이르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고다.
아파트 주변 도로와 주차장에도 토사와 돌, 나뭇가지가 밀려들었고 차량들이 흙더미에 파묻히는 피해가 발생했다. 17일 오전 10시 기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잠정 집계한 이번 남해안 집중호우 인명피해는 사망 1명, 부상 4명이었다.
통영에서는 산사태에 매몰.. 가까스로 구조
통영에서도 자칫 대형 인명피해로 이어질 뻔한 아차 사고가 발생했다. 17일 오전 통영시 산양읍 곤리도에서 폭우로 산사태가 발생하면서 주택에 있던 주민 1명이 토사에 매몰됐다.
신고를 받은 통영해경과 소방당국, 관계기관이 긴급 구조에 나섰고 매몰된 주민은 구조돼 병원으로 이송됐다. 다행히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섬 지역인 곤리도는 접근 자체가 쉽지 않아 해경과 소방당국이 구조에 함께 나섰다. 거제와 통영에서 산사태가 잇따른 것은 단기간 기록적인 양의 비가 쏟아지면서 산비탈의 토양이 더 이상 물을 흡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누적강수량이 수백㎜에 이르면 흙 속의 빈 공간이 물로 포화돼 토양을 지탱하는 힘이 급격하게 약해진다.
가뭄에 메말랐던 산과 토양에 비가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흘 동안 여름철 전체 강수량에 육박하는 비가 쏟아지면서 이번에는 산 자체가 버티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도로도 주택도 물바다.. 신고 2,000건 육박
산사태뿐만이 아니었다. 거제와 통영에서는 도로와 주택이 물에 잠기고 차량이 고립되면서 소방당국에 구조 요청이 쇄도했다.
17일 오후 정부와 소방당국 집계에서는 거제·통영에서 접수된 집중호우 관련 신고가 1,900건을 넘어섰다. 소방당국은 국가소방동원령을 발령하고 다른 지역의 소방력까지 투입해 구조·배수·안전조치에 나섰다. 136명이 구조된 것으로 집계됐다.
거제 연초면에서는 토사가 도로로 쏟아져 시민의 발이 흙 속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해 소방대원들이 구조하기도 했다.
거제 도심 곳곳은 흙탕물과 토사로 뒤덮였다. 하천처럼 변한 도로를 자동차가 제대로 이동하지 못했고, 일부 도로에서는 돌과 나무가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차량 통행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전날인 16일까지만 해도 경남의 호우 피해는 주로 가로수 전도와 지하공간 침수, 낙석 등 시설물 피해에 집중됐다. 하지만 밤사이 시간당 100㎜가 넘는 극한호우가 이어지면서 17일에는 산사태 사망자까지 발생하는 등 피해 양상이 훨씬 심각해졌다.
한화오션·삼성중공업도 “출근하지 말라”
기록적인 폭우는 거제 경제의 핵심인 조선업도 멈춰 세웠다. 한화오션은 17일 오전 전사방재종합상황실을 통해 직원들에게 거제지역 도로가 통제돼 출근이 어렵다는 내용의 공지를 전달했다.
삼성중공업 역시 이날 휴일 특근 예정 노동자들에게 출근하지 말고 대기하도록 안내했다. 이날은 광복절 연휴 마지막 날이어서 전체 근로자의 정상 출근일은 아니었지만, 조선소에서 특근을 할 예정이던 직원들의 출근이 사실상 제한된 것이다.
한화오션 관계자는 집중호우로 휴일 출근을 통제하고 있다며 사업장 야드 일부 지역에 침수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양사는 도크와 각종 생산시설에 추가 피해가 있는지도 점검했다.
거제 조선산업은 대형 블록과 선박 기자재를 야외에서 이동·조립하는 공정이 많다. 도로가 침수되고 야드가 물에 잠기면 근로자 안전은 물론 대형 크레인과 전기설비, 물류 이동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폭우 피해가 단순한 주택과 도로 침수를 넘어 지역의 핵심 산업시설 가동까지 위협한 셈이다.
울산도 137㎜.. 가로수 쓰러지고 도로 잠겨
울산도 물폭탄을 피하지 못했다. 울산소방본부에 따르면 16일부터 17일 오전 9시 40분까지 울산에는 137.2㎜의 비가 내렸다. 울산공항 123㎜, 두서 117㎜, 장생포 110.5㎜, 삼동 110㎜ 등 곳곳에서 100㎜를 웃돌았다.
강풍까지 겹치면서 피해가 잇따랐다. 17일 오전 7시 24분께 울산 남구 신정동에서는 가로수가 도로 쪽으로 쓰러졌다. 이를 발견한 70대 택시기사가 급정거하는 과정에서 다쳐 병원으로 이송됐다. 중구 우정동에서는 도로가 침수됐고 울주군 두서면에서는 낙석이 발생했다. 북구 중산동에서도 나무가 쓰러지는 사고가 접수됐다.
전신주에서 불꽃이 튀었다는 신고도 들어와 소방당국이 안전조치를 했다. 거제·통영에 비하면 강수량은 적었지만, 이미 많은 비로 지반이 약해진 상황에서 추가 강수가 이어질 경우 산사태와 낙석 피해가 확대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부, 새벽 6시 중대본 가동.. 30억원 긴급 지원
행정안전부는 거제 등 남부지방에 극한호우가 이어지자 17일 오전 6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1단계를 가동했다. 중대본부장인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은 “호우가 그치고 피해 수습이 마무리될 때까지 총력 대응하겠다”며 주민들에게 재난안전정보를 수시로 확인하고 산사태 위험지역과 하천변 등 위험지역에 접근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정부는 피해 수습을 위한 긴급 재정지원에도 나섰다. 행안부는 피해가 집중된 지역에 특별교부세 30억원을 긴급 지원하고, 이재민 등의 응급구호를 위해 재난구호사업비 4,000만원도 별도로 투입하기로 했다.
소방당국은 국가소방동원령을 발령해 인접 시·도의 구조·구급 인력과 장비를 피해지역으로 집중 배치했다. 도로·주택 침수지역에서는 주민 구조와 배수작업을 벌이고, 산사태 우려지역과 고립지역을 중심으로 인명 검색도 이어갔다.
거제·통영에 왜 폭우 집중됐나
이번 기록적 폭우에는 저기압과 고기압이 마주치는 경계에 있었던 것으로 분석됐다. 제13호 태풍 ‘돌핀’이 약화한 저기압이 우리나라 남서쪽에서 접근한 것이 시작이었다. 북반구 저기압은 반시계 방향으로 바람이 불기 때문에 저기압이 접근하면서 한반도 남쪽에서 따뜻하고 습한 남풍이 지속적으로 유입됐다.
동시에 우리나라 북동쪽에는 고기압이 자리 잡았다. 저기압과 고기압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면서 이른바 ‘바람길’이 만들어졌고, 남쪽에서 올라오는 바람은 더욱 강해졌다.
여기에 남해의 바닷물 온도가 27~28도에 이를 정도로 높았다. 따뜻한 바다 위를 지나온 바람에는 막대한 수증기가 실리고, 이 고온다습한 공기가 거제와 통영을 비롯한 남해안의 산악지형에 부딪혀 위로 솟구치면서 강력한 비구름이 계속해서 만들어졌다.
기상청은 이러한 조건들이 겹치면서 거제와 통영에 관측 이래 가장 강하고 많은 비가 내린 것으로 분석했다.
‘가뭄 해갈’ 대가가 너무 컸다
가뭄 속 단비였지만, 피해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광복절을 앞두고까지 경남을 비롯한 남부지방은 극심한 가뭄에 시달렸다. 농업용 저수지의 물은 평년보다 크게 줄었고 농가에서는 논과 밭에 물을 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기상청이 15~17일 남부지방에 많은 비를 예보하자 가뭄 해갈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실제로 사흘간 수백㎜의 비가 내리면서 경남지역의 극심한 가뭄은 상당 부분 해소된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현실은 한 시간에 100㎜가 넘는 물폭탄이었다. 토양이 물을 받아들일 시간도 없이 비가 쏟아졌다. 산은 물을 품지 못했고, 흙과 돌은 비탈면을 따라 주택가로 내려왔다.
하천과 배수시설은 한꺼번에 밀려든 물을 감당하지 못했고, 그 결과 가뭄은 물러났지만 산사태와 침수라는 또 다른 재난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분석됐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기후재난을 폭염, 가뭄, 호우, 산사태처럼 각각 따로 관리했다면 이제는 이들이 서로 연결돼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복합재난’의 관점에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