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재난안전뉴스 박종열 기자 |
산업현장의 ‘안전’은 이제 ‘비용’이 아니다. ‘안전’은 생산성이고, 기업가치이며, 결국 기업의 생존과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경영요소라는 인식이 커져가고 있다. 이재명 정부도 산업안전을 국가의 중요한 현안 중 하나로 삼고 있다.
특히 올해 8월 1일부터 500인 이상 기업에 대한 ‘안전보건 공시제’가 시행돼 기업은 안전보건 관리체제, 산업재해 발생 현황, 안전보건 투자, 산업재해 재발방지 대책 등을 의무적으로 공개해야 한다.
이제는 기업주가 안전을 비용으로 생각하는 시대에서 투자와 경쟁력으로 인식하는 시대로 넘어가야 한다. 한국재난안전뉴스는 ‘안전이 기업을 살린다’ 기획연재를 통해 안전 문제가 기업의 핵심적 경영 요소이자 생존 전략이라는 점을 부각하고, 안전한 기업이 어떻게 더 강한 기업이 되는지 약 20회에 걸쳐 답을 찾아본다. [편집자 주]
산업현장에서 사고가 나면 기업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린다. 사망자 및 재해 규모와 사고 원인이 공개된다. 하지만 사고가 나기 전까지 그 기업이 안전에 얼마나 투자를 했고, 안전관리 인력을 얼마나 두고, 위험 요인을 어떻게 관리했는지는 외부에서 알기 어려웠다.
이제 이 같은 기업의 ‘안전 성적표’가 공개된다.
8월 1일부터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이 안전보건 관련 주요 현황을 매년 공시하도록 한 ‘안전보건 현황 공시’ 제도가 시행됐다.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으로 신설된 제도다.
◇ 안전보건 공시 제도, 왜 만들었나
그동안 기업의 재무상태나 경영성과는 사업보고서 등을 통해 상당 부분 공개됐지만, “이 기업이 노동자 안전에 얼마나 투자하고 있는가”는 기업마다 공개 수준이 달랐다.
정부가 이 제도를 도입한 이유는 기업의 안전보건 정보를 공개해 노동자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 기업 스스로 안전관리를 강화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다.
즉, “안전은 기업 내부의 문제”였던 것이 “안전도 외부에 공개해야 할 기업정보”로 바뀌는 것이다.
핵심은 간단하다. 지금까지 기업 내부에 머물렀던 안전보건 정보가 앞으로는 외부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경영정보가 된다는 것이다.
◇500명 이상 기업, 무엇을 공개하나
공시 대상은 상시근로자 500명 이상을 사용하는 사업주다. 건설업은 다르다. 연간 건설공사금액 1,200억 원 이상인 건설사업주가 대상이다. 공공기관과 지방공사·지방공단도 법률상 공시 대상에 포함된다.
공시 내용은 단순한 사고 숫자에 그치지 않는다. 안전보건관리체제, 산업재해 발생 현황, 전년도 안전보건 활동 실적과 해당 연도의 활동 계획, 안전보건 투자, 산업재해 재발방지 대책과 이행계획 등을 공개해야 한다.
시행령에는 관계수급인(하청) 근로자의 사망사고 현황과 공공 건설발주공사의 사고사망 현황도 포함됐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투자’다. 그동안 기업의 안전관리는 사고가 발생했느냐, 법 위반이 있었느냐를 중심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았다. 앞으로는 사고가 나지 않은 기업이라도 얼마나 안전에 투자했는지, 어떤 예방활동을 했는지가 평가 대상이 된다.
고용노동부가 이번 제도를 도입하면서 기대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기업의 안전보건 투자와 재해예방 노력을 투명하게 공개해 기업 스스로 안전관리에 대한 책임의식을 높이고 자율적인 산재예방 활동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안전은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관리해야
안전보건공시제가 주목받는 이유는 산업재해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산업재해 보도는 사고가 발생한 뒤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공장에서 누가 다쳤는지, 사망자가 몇 명인지, 경찰과 노동부가 원인을 밝혀냈는지가 주요 관심사였다.
하지만 안전은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관리해야 한다. ‘사고가 난 기업’만 주목해선 안 된다.
예를 들어 근로자 1,000명을 둔 두 제조기업이 있다고 하자. 한 기업은 안전관리 인력을 충분히 확보하고 위험성 평가와 설비 개선에 꾸준히 투자한다. 다른 기업은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안전 관련 지출을 최소화 한다.
두 기업 모두 당장 사고가 없다면 겉으로는 ‘안전한 기업’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 위험 수준은 같다고 보기 어렵다. 안전보건공시제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이런 차이가 드러날 수 있다.
산업안전 전문가들은 이 같은 정보가 축적되면 기업의 안전관리가 서류 작성에 그치지 않고 실제 경영의 문제로 다뤄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김동현 법무법인 율촌 파트너변호사는 “안전보건 현황 공시제 신설과 관련해 기업이 안전보건 투자 규모를 별도로 집계할 수 있는 회계·관리체계를 갖출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안전 관련 비용을 제대로 파악하고 관리하지 못하면 공시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제도에서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원청 소속 노동자만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청 노동자의 사망도 공시한다. 시행령은 관계수급인 근로자의 사망사고 현황을 공시 항목에 포함했다. 제조업 공장이나 건설현장에서 실제 위험한 작업을 맡는 경우가 많은 하청·협력업체 노동자의 안전도 기업의 안전관리 수준을 판단하는 데 포함시키겠다는 의미다.
이 문제는 한국 산업안전에서 오랫동안 지적돼온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원청기업의 생산시설에서 하청노동자가 작업하다 사고를 당했을 때, 기업의 전체 안전관리 수준을 평가하면서 원청 직원의 사고만 볼 수는 없다. 이번 공시제는 적어도 공개되는 정보의 범위에서 이 같은 사각지대를 일부 줄이는 방향으로 설계됐다.
◇2027년 4월 첫 공시 때 잘 분석하고 따져봐야
다만 제도가 8월 1일 시행됐다고 해서 기업들의 안전 성적표가 당장 한꺼번에 공개되는 것은 아니다.
관련 규정에 따르면 안전보건 현황은 매년 공시하도록 하고, 공시 절차와 방법을 구체적으로 정하고 있다. 공시 의무자는 매년 4월 30일까지 고용노동부장관이 지정하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재하는 방법으로 고시하여야 한다. 이러한 공시 의무를 위반할 경우 1000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따라서 올해 제도가 시행된 뒤 기업들이 실제로 어떤 자료를 준비하고 어떻게 관리하는지가 중요하다. 첫 본격적인 공시자료가 쌓이면 기업별 안전투자와 재해 현황을 비교·분석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질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제도는 기업을 A·B·C 등급으로 평가해 순위를 매기는 ‘안전등급제’는 아니다. 기업이 법에서 정한 안전보건 정보를 공시하도록 하는 제도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앞으로 이 데이터를 누가 어떻게 분석하느냐이다.
바로 여기에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기업이 공시한 숫자를 그대로 옮기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안전투자액이 실제 현장 개선으로 이어졌는지, 투자 규모가 큰 기업의 사고율이 실제로 낮은지, 반복 사고가 발생한 기업은 재발방지대책을 제대로 이행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안전 성적표’가 기업 경쟁력이 될 수 있을까
안전보건공시제는 기업에 또 하나의 부담을 추가하는 규제로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보면 기업의 안전 수준을 경쟁력으로 만드는 장치가 될 가능성도 있다.
소비자는 제품의 가격과 품질을 비교하고, 투자자는 기업의 매출과 영업이익을 비교한다. 앞으로는 노동환경과 안전관리 수준도 기업을 평가하는 하나의 정보가 될 수 있다. 특히 중대재해가 반복되는 기업과 예방에 지속적으로 투자하는 기업 사이의 차이가 공개된 데이터로 드러난다면 안전은 더 이상 ‘비용’이라는 이유만으로 뒤로 미루기 어려워진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공시 그 자체가 아니다. 공시된 숫자와 계획이 실제 현장에서 노동자의 생명을 지키는 행동으로 이어지느냐다. 안전보건공시제가 기업의 또 다른 서류작업으로 끝난다면 제도의 의미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반대로 안전투자와 재해예방 성과가 기업의 평판과 경쟁력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될 수 있다.
8월 1일 시작된 안전보건공시제는 이제 막 첫발을 뗐다. 앞으로 공개될 기업들의 안전 성적표가 ‘사고가 없었던 기업’을 보여주는 데 그칠지, 아니면 ‘사고가 나지 않도록 돈과 사람을 투자한 기업’을 가려내는 지표가 될지 주목된다. 안전은 더 이상 공장 안에만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제 기업 밖으로 나와 시장의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기업 경영진에게 “안전에 얼마를 썼습니까”라는 질문이 재무제표의 숫자만큼 중요해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