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재난안전뉴스 박광춘 기자 |
입추가 지나도록 40도 안팎의 폭염이 한반도를 달구면서 농축산물 생산에 차질로 이어져 밥상 먹거리까지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밭에서는 상추와 시금치 같은 잎채소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축사에서는 닭과 돼지가 더위를 견디지 못해 쓰러지고 있다. 사과와 배 등 과수는 강한 햇볕에 데이고, 바다에서는 높은 수온으로 광어와 우럭 등 양식어류 폐사가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9일 농림축산식품부와 관련 업계에 따르면, 당장 우리나라 전체 농축수산물 공급이 흔들릴 정도는 아니다. 정부도 현재까지 파악된 피해가 전체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폭염이 길어질수록 사정은 달라진다. 농산물 생산량과 상품성이 떨어지고 가축의 성장과 산란율이 낮아지는 데다, 농가가 냉방과 급수에 써야 하는 비용까지 증가한다.
여기에 산지에서 소비자 식탁까지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한 냉장·냉동 비용마저 커지면 결국 가격을 밀어 올리는 압력으로 작용하는데, 폭염이 농촌과 어촌의 피해를 넘어 국민의 장바구니 물가를 끌어올리는 이른바 ‘히트플레이션(Heatflation)’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폭염에 민감한 상추·시금치 등 채소부터 악영향
폭염의 충격은 이미 채소 가격에서 나타나고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지난 6일 시금치 100g의 평균 소매가격은 1,974원으로 한 달 전보다 131.7% 올랐다. 한 달 전 2,500원대였던 300g 한 단 가격으로 환산하면 6,000원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상추도 100g당 1,627원으로 한 달 사이 42.6% 올랐다. 애호박은 개당 1,498원으로 47.7%, 대파 1㎏은 3,113원으로 7.1% 상승했다.
폭염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작물 가운데 하나가 상추와 시금치 같은 엽채류다. 이들 작물은 비교적 서늘한 기온에서 생육이 좋다. 기온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광합성 효율이 떨어지는 반면 호흡량은 증가해 생육이 둔화하고, 땅속 수분이 빠르게 증발하면서 잎이 시들거나 타들어가고 만다.
상추는 고온이 이어지면 꽃대가 일찍 올라오는 ‘추대’ 현상이 나타나고, 잎이 질겨지고 쓴맛이 강해져 상품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농가 입장에서는 단순히 수확량만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같은 양을 수확해도 시장에 정상 상품으로 내놓을 수 있는 비율이 낮아져 실제 소득 손실은 더 커질 수밖에 없어 농심도 타들어가는 상황이다.
폭염 직전까지는 농산물 가격이 비교적 안정적이었다는 점도 눈에 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 6월 까지도 이른 더위에 따른 ‘히트플레이션’ 우려에도 농산물 재배면적 증가와 양호한 작황으로 상당수 품목 가격이 전년·평년보다 낮은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불과 한 달여 만에 장기간의 극한 폭염이 이어지면서 일부 품목에서 상황이 빠르게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 상추만의 문제 아니다.. 배추·과일까지 ‘시간차 피해’
더 걱정스러운 것은 폭염 피해가 지금 당장 시장에 나오는 채소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농산물 가격은 기상재해가 발생한 뒤 일정한 시차를 두고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현재 밭에서 생육 중인 작물이 폭염 피해를 입으면 몇 주 또는 몇 달 뒤 출하량 감소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배추와 무 같은 고랭지 채소는 서늘한 기온에서 잘 자란다. 고온이 장기간 이어지면 배추가 제대로 속이 차지 않는 결구 불량이 발생할 수 있고, 병해충에도 취약해진다. 여기에 집중호우까지 반복되면 뿌리가 상하거나 토양의 양분이 유실돼 작황이 더욱 악화할 수 있다.
농식품부도 지난달 20일 수급상황 점검회의에서 집중호우와 폭염이 반복되면 농작물 병해충이 확산하고 가축의 고온 스트레스가 증가해 추가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닭 43만마리 폐사 신고.. 왜 가금류가 폭염에 약할까
축산 농가는 더 직접적인 피해를 보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 7일 오전 8시 기준 폭염으로 가축재해보험에 폐사 피해가 신고된 가축은 총 83만603마리다.
이 가운데 닭·오리·메추리 등 가금류가 78만8,284마리로 전체의 약 95%를 차지했다. 돼지도 4만2,319마리가 폐사한 것으로 신고됐다. 가금류 가운데 육계가 43만1,278마리로 가장 많았고 산란계도 4만8,719마리에 달했다.
닭이 폭염에 특히 취약한 것은 체온 조절 능력 때문이다. 닭은 사람처럼 땀을 흘려 몸의 열을 식힐 수 없다. 기온이 올라가면 입을 벌린 채 빠르게 호흡하는 ‘팬팅’을 통해 체온을 조절하는데, 축사 내부 온도가 30도를 훌쩍 넘고 습도까지 높아지면 이 같은 체온 조절에도 한계에 도달하고 만다.
폐사하지 않더라도 피해는 남는다. 고온 스트레스를 받은 닭은 사료 섭취량이 줄어 성장 속도가 떨어진다. 산란계는 알을 낳는 양이 줄거나 계란 크기와 품질이 떨어질 수 있다.
돼지도 땀샘이 발달하지 않은 데다 두꺼운 지방층 때문에 체내 열을 배출하기 어려워 폭염에 취약하다. 사료 섭취량이 감소하면서 체중 증가 속도가 늦어지고 번식률도 떨어질 수 있다.
살아 있는 닭도 덜 자란다.. 계란 생산도 줄어
육계의 성장 속도가 떨어지면 같은 기간 시장에 출하되는 닭고기 물량이 감소할 수 있다. 산란계의 산란율이 떨어지면 계란 공급에도 영향을 준다.
농식품부는 아직 폭염으로 인한 폐사가 전체 사육 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제한적인 만큼 당장 닭고기나 계란 공급이 크게 흔들릴 상황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실제로 정부는 지난달 20일 집중호우와 폭염으로 육계 등 20여만마리가 폐사했을 당시에도 전체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해 수급에는 차질이 없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당시보다 가축 폐사 신고는 빠르게 늘었다. 농식품부는 이에 냉방·급수 지원과 축사 온도를 낮추는 시설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지난달 29일부터는 축산분야 폭염 대응 전담 상황실도 운영하고 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폭염 대응의 근본적인 대책과 관련해 “축사시설 현대화 사업을 통해 냉방장비와 환기시설 등의 설치를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바다까지 달아올랐다.. 광어·우럭도 ‘떼죽음’
폭염 피해는 육지를 넘어 바다로 번지고 있다. 해양수산부 집계 등을 종합하면 지난 7일 오후 5시 기준 폭염과 고수온으로 폐사한 것으로 신고된 양식어류는 약 57만마리다. 광어가 22만3,000마리로 가장 많았고 우럭 16만1,000마리, 강도다리 15만1,000마리, 숭어 3만3,000마리 등이 뒤를 이었다.
해수부는 현재까지의 피해량은 전체 사육량의 약 0.15%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이 역시 당장 수산물 공급 부족으로 연결됐다고 단정할 단계는 아니지만 바다가 계속 뜨거워질 경우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해수부는 올해 여름 우리나라 주변 해역의 수온이 평년보다 약 1도 높을 것으로 예상해 액화산소 공급장치 등 고수온 대응 장비를 지난해보다 31% 늘려 공급키로 했다.
지난달 21일에는 서·남해 내만과 제주 연안 8개 해역에 고수온 주의보가 내려지면서 해수부의 고수온 재난 예·경보도 ‘경계’ 단계로 높아졌다. 수온이 올라가면 물속에 녹아 있는 산소량은 감소하고, 물고기의 호흡과 면역 기능이 떨어지고 먹이 섭취도 감소한다. 이러한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면 양식장에서 집단 폐사가 나타날 가능성이 커진다.
이미 비싼 수산물.. 고수온까지 겹치면 부담 커질 수도
수산물은 이미 가격 부담이 상당하다. 국가데이터처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수산물 소비자물가는 1년 전보다 3.9% 올라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 2.8%를 웃돌았다. 조기는 10.1%, 갈치는 9.4%, 고등어는 7.0% 올랐다.
이 가격 상승이 모두 폭염 때문인 것은 아니다. 어획량과 연료비, 수입가격, 환율, 계절적 수요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고수온 피해가 장기화해 양식어류 출하량까지 감소할 경우 수산물 가격을 추가로 끌어올리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게 업계의 우려다.
농민, 생산비 증가하고 생산량은 줄어
폭염이 먹거리 가격을 자극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생산비다. 기온이 올라가면 농민과 축산농가는 작물을 살리고 가축을 살리기 위해 평소보다 더 많은 비용을 들여야 한다.
시설하우스에서는 환풍기와 차광시설을 가동하고, 과수원에서는 물을 뿌리거나 차광제를 사용해야 한다. 축사에서는 대형 송풍기와 쿨링패드, 냉방장치를 장시간 가동한다. 가축의 고온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영양제와 전해질을 추가로 공급하기도 한다.
농업용수가 부족하면 관정을 가동하거나 양수기와 살수차까지 동원해야 하고, 양식장 역시 액화산소 공급장치와 산소발생기를 가동하고 차광막을 설치해야 하는 등 결국 생산비 상승으로 이어진다.
상추값이 삼겹살집 가격으로.. 히트플레이션의 경로
결국 이런 비용 상승의 최상단에는 소비자의 밥상이다. 폭염으로 상추와 깻잎 가격이 오르면 고깃집의 식재료 원가가 올라가고, 닭의 성장과 산란이 줄어 닭고기와 계란 가격이 상승하면 치킨집과 제과점, 식품업체까지 영향을 받는다.
우유 생산량이 감소하면 유제품과 제과·제빵 업계 비용 부담이 커질 수 있다. 수산물 가격이 오르면 횟집과 생선구이 전문점의 원가도 상승하게 된다.
결국 농산물 가격 상승이 가공식품과 외식 가격으로 번지면 일시적인 채소값 상승이 전체 생활물가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이 ‘히트플레이션’이 무서운 이유다.
특히, 폭염이 당장 끝나도 생산을 통해 가격 상승의 여파는 후행적으로 나타나는데, 농작물이 다시 자라고 가축 사육 규모가 회복되고 출하량이 정상화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부도 “장기화가 변수”.. 비축·수입·현장 지원 병행
정부도 기상여건을 여름철 농축산물 수급의 가장 큰 변수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농식품부는 지난달 수급상황 점검회의에서 폭염과 집중호우 피해가 당시 전체 생산량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았지만 강우와 폭염이 반복될 경우 병해충 확산과 가축의 고온 스트레스로 추가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박정훈 농림축산식품부 식량정책실장은 당시 “여름철 기상 여건에 따른 수급 불안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요 품목의 생육 및 수급 상황을 상시 점검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한편, 농업인의 경영 부담 완화를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병해충 방제용 약제와 영양제 공급, 열차단도포제 지원 등을 확대하고 있다. 계란과 닭고기 등 일부 축산물에 대해서도 공급 확대와 수입을 병행하고 있다. 계란은 신선란 수입 물량을 확대하고, 육계의 경우 부화용 종란 수입을 통해 공급 기반을 보완하고 있다.
해수부도 고수온 피해 지역을 대상으로 액화산소 공급장치와 차광막 등을 가동하고, 필요할 경우 양식어류의 조기 출하와 긴급 방류를 유도할 방침이다.
폭염은 자연재난이지만, 결국 사회재난으로
기후변화 시대의 폭염은 더 이상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상추가 자라지 못하고 사과가 햇볕에 데이며, 닭이 죽고 바닷속 물고기가 높은 수온을 견디지 못하는 순간 폭염은 곧 식량의 문제가 된다.
더구나 우리 먹거리의 생산과 소비 과정은 서로 연결돼 있다. 폭염이 농작물 생산량을 줄이면 가격이 오르고, 생산비와 유통비가 동시에 상승하면 외식업과 식품산업으로 충격이 번진다. 소비자는 결국 마트 계산대와 음식점 메뉴판에서 그 비용을 부담하게 된다.
일단 현재로선 정부가 현재까지의 피해를 전체 수급을 흔드는 수준으로 평가하지 않고 있지만, 그 위험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된다. 6월까지만 해도 비교적 안정적이던 일부 채소 가격이 한 달여의 극심한 더위를 거치면서 빠르게 올라가는 모습은 기상이 먹거리 가격을 얼마나 빠르게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기후재난로 인해 폭염은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앞으로 이를 식량 안보 측면에서 적극적인 해법 모색에 나서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