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재난안전뉴스 박광춘 기자 |
정부가 전국 공장과 창고 19만 동 이상을 대상으로 건축·소방·산업안전·위험물 관리 실태를 한꺼번에 들여다보는 대규모 합동조사에 나선다. 위험물시설의 외장재 기준을 ‘준불연’에서 ‘불연’으로 높이고, 연면적 5,000㎡ 이상 공장은 모든 층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도록 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규제 강화에 따른 기업 부담을 줄이기 위해 2,000억 원 규모의 보조사업과 1조2,500억 원 규모의 안전투자 대출 프로그램도 새로 만든다. 정부는 단속과 처벌 위주의 사후 대응에서 벗어나 조사와 예방, 투자 지원, 위반행위 억제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 공장 화재안전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구상이다.
정부는 31일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주재로 열린 비상경제본부 회의 겸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관계부처 합동으로 이 같은 내용의 ‘공장화재 안전 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대형 참사 뒤에야 드러난 ‘부처별 칸막이’
이번 대책은 제조현장에 누적된 구조적 취약성을 더는 개별 사업장의 책임만으로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마련됐다.
공장은 건축법과 산업안전보건법, 위험물안전관리법, 화학물질관리법 등 여러 법률의 적용을 받는다. 그러나 건축 구조는 국토교통부와 지방정부, 소방시설과 위험물은 소방청, 작업장 안전은 고용노동부, 유해화학물질은 기후에너지환경부가 각각 관리해 왔다. 개별 기준을 모두 통과했더라도 공장 전체의 화재 위험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불법 증축과 무단 구조변경, 가연성 샌드위치패널, 노후 전기설비, 방화구획 훼손, 위험물 혼재 보관 등이 겹치면 작은 불도 순식간에 대형 참사로 번질 수 있어 실제 현장에서의 문제가 커져왔다. 특히, 생산 효율을 높이기 위해 설비와 원자재를 빽빽하게 배치한 공장·창고의 구조도 진입과 인명 검색, 소방용수 침투를 어렵게 한다.
지난 3월 대전 안전공업 화재로 14명이 숨졌고, 6월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대전사업장에서는 폭발 사고로 5명이 사망하고 2명이 다쳤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사고는 화약이 묻은 공구를 세척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됐다.
공장 화재의 피해는 해당 기업에만 머물지 않는다. 부품 공급이 끊기면 완성품 생산까지 멈추고, 협력업체와 노동자의 고용도 위협받는다. 정부 자료에 따르면 산업재해율이 1% 증가할 경우 기업의 매출액 성장률은 0.45~0.71% 하락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안전투자를 비용이 아니라 생산성과 공급망을 지키는 투자로 봐야 한다는 의미다.
73만 동 가운데 19만 동+α…고위험 시설부터 조사
정부는 지난 6월 17일부터 7월 22일까지 진행한 시범조사 결과를 토대로 8월 중 조사 대상과 방식을 확정한 뒤 9월부터 본조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기본 조사 대상은 연면적 500㎡ 이상 공장 16만7,000동과 창고 2만4,000동 등 약 19만 동이다. 전국 공장·창고 약 73만 동의 26%에 해당한다. 다만 위험물보관소와 산재 발생 위험 사업장, 인화성 유해화학물질 취급시설은 500㎡ 미만이라도 조사 대상에 포함한다. 정부가 밝힌 ‘19만 동+α’가 전국의 모든 공장·창고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규모가 작더라도 위험도가 높은 시설까지 포괄한다는 취지다.
조사는 화재 위험도에 따라 세 단계로 나눠 진행된다. 올해 9월부터 12월까지 실시되는 1단계에서는 위험물을 보유한 초고위험·고위험 공장과 창고 약 4만 동을 살핀다. 내년 6월까지 진행되는 2단계 조사에는 산재 발생 위험 사업장 등 약 4만 동이 포함된다. 나머지 11만 동 이상은 내년 말까지 3단계 조사를 받는다. 석유화학 등 폭발·화재 위험이 큰 업종은 별도로 집중 조사한다.
조사 항목은 불법 증축과 위반건축물 여부, 샌드위치패널의 난연 성능, 방화구획, 비상구, 스프링클러와 소화전, 위험물 보관 상태, 전기·산업·화학안전 관리 실태 등이다. 국토부가 주관하고 노동부·기후부·소방청·지방정부가 합동조사단을 구성한다. 건축사와 소방기술사 등 민간 전문가와 청년 인력도 조사에 투입된다.
고위험 건물은 전문가 중심의 정밀조사반이 맡고, 일반 건물은 공무원과 청년 인력이 참여하는 기본조사반이 점검한다. 불법 증축 등 위반사항은 현장에서 즉시 개선하도록 하고 조사 결과는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해 오는 2028년부터 안전정책과 후속 점검에 활용할 방침이다.
이진철 국토부 건축정책관은 앞서 실태조사 추진계획을 발표하면서 “관계부처가 함께 대규모 실태조사를 실시하는 것은 처음”이라며 “공장·창고 화재안전에 필요한 사항을 면밀히 확인하고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는 제도 개선으로 연결하겠다”고 밝혔다.
위험물시설 외벽 ‘불연’으로…5,000㎡ 공장 전층 스프링클러
시설 기준도 대폭 강화한다. 주유소와 액화석유가스(LPG) 충전소, 위험물·유독물 저장소, 고압가스 충전·판매소 등 위험물시설은 현재 준불연 외장재를 사용할 수 있지만, 앞으로는 불연 외장재를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정부는 관련 기준을 올해 12월까지 개정할 계획이다.
공장 내화구조 적용 대상도 확대할 예정이다. 현재 내화구조 적용에서 제외되는 얼음·생수·금속업종 등 63개 업종을 포함해 모든 업종에 기준을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한다. 준불연 외장재 적용 대상 역시 현재 6층 또는 높이 22m 이상에서 3층 또는 높이 9m 이상으로 확대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소방시설 기준도 달라진다. 연기나 온도만 감지하는 일반감지기 대신 작업장 환경과 복수의 신호를 종합해 실제 화재 여부를 판별하는 지능형 화재감지기 설치를 의무화한다. 공장에서는 먼지나 수증기, 작업 열기 때문에 오경보가 잦아 경보장치를 꺼 놓거나 무시하는 사례가 발생한다는 점을 고려한 조치다.
스프링클러 설치 범위는 현재 ‘4층 이상이면서 해당 층 바닥면적이 1,000㎡ 이상인 층’에서 ‘연면적 5,000㎡ 이상 공장의 모든 층’으로 확대한다. 금속분진과 가공유를 취급하는 작업에는 별도의 관리 의무를 부여하고, 2028년까지 위험물시설 전문 점검업도 도입키로 했다.
최대 1억원 보조지원.. 안전투자에 3조원 정책금융
정부는 이번 안전강화와 관련, 기준만 높이고 비용을 기업에 떠넘길 경우 영세 사업장이 투자를 미루거나 음성화할 수 있다는 지적을 고려해 지원책도 함께 내놨다.
먼저 내년부터 2031년까지 5년간 2,000억원 규모의 화재·폭발 예방 보조사업을 신설한다. 상시근로자 300명 미만 사업장이 인공지능(AI) 화재감지기와 전기안전 모니터링 시스템, 스마트 피난유도설비, 소화기 등을 구입하거나 스프링클러·비상구를 설치하고 노후 분전함과 샌드위치패널을 교체할 때 지원한다. 사업장당 지원 한도는 최대 1억원이다.
중소·중견기업을 대상으로는 총 1조2,500억원 규모의 가칭 ‘화재제로·안전투자 대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중소기업에는 2,500억 원의 장기·저리 융자를 공급하고, 중견기업에는 시중은행 대출 1조원에 대해 금리 2%포인트를 지원한다. 기업별 대출 한도는 최대 20억원이다.
산업은행 1조5,000억원, 기업은행 1조원, 신용보증기금 5,000억원 등 총 3조원 규모의 정책금융도 안전설비 투자에 투입한다. 고위험 사업장 약 2만곳에는 사람이 없어도 화재를 감지해 소화약제를 분사하는 자동확산소화기를 단계적으로 보급한다.
첨단 안전기술을 신성장·원천기술로 지정해 투자세액공제율을 높이고, 중소기업이 안전설비에 투자하면 기준 내용연수를 절반으로 줄이는 가속상각도 도입한다. 대기업이 상생협력기금을 통해 협력업체의 화재예방 설비를 개선해 주면 투자액의 10%를 법인세에서 공제키로 했다.
보험계약 이후 소화기와 화재탐지장치, 스프링클러 등을 설치하더라도 사고 없이 계약기간이 끝나면 보험료 할인분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제도 개선도 추진한다. 안전투자 우수기업에는 공공입찰 가점을 주고 중대재해 발생기업에는 감점 등 불이익을 부여할 계획이다.
불법건축물 설계·시공자까지 처벌한다
사후 관리도 강화된다. 건축물 사용승인 이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허가권자가 불법 증축과 구조변경 여부를 다시 확인하는 사후검사제도를 도입한다. 지방정부가 재량으로 실시하던 실태조사는 연 1회 이상 의무화하고 필요하면 수시 조사도 할 수 있도록 건축법을 개정키로 했다.
불법 상태가 시정되지 않을 때 부과하는 이행강제금은 반복 부과도 의무화한다. 가중 부과 기준도 현행 ‘최대 100% 이내’에서 ‘50~100%’로 하한선을 설정한다. 처벌 대상은 불법건축물 건축주뿐 아니라 이를 설계하거나 시공한 사람과 무등록 업체까지 확대한다.
정부는 1단계 본조사가 진행되는 9월부터 12월까지 안전신문고에 ‘공장화재 예방 집중신고기간’을 운영한다. 우수 신고 포상금은 현행 건당 20만~100만원에서 20만~200만원으로 높일 예정이다. 내부 공익신고로 과징금이나 벌금이 부과·환수되면 그 금액의 최대 30%를 포상금으로 지급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일반 국민의 공익신고 포상금은 최대 5억 원까지 지급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관건은 ‘조사 이후’…기존 공장 개선까지 이어져야
이번 대책은 여러 부처가 따로 관리하던 공장 안전정보를 하나로 묶고, 규제 강화와 기업 지원을 동시에 추진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신축 건물의 허가 기준을 높이는 데 머물지 않고 기존 공장·창고의 실제 운영 상태를 현장에서 확인한다는 점도 이전 대책과 다르다.
다만 조사 대상 19만 동은 전국 공장·창고의 약 26%다. 500㎡ 미만 소규모 시설 가운데 위험정보가 제대로 등록되지 않은 사업장은 조사망에서 빠질 가능성이 있다. 지방정부와 소방서의 인력 부족, 부처별 데이터의 호환성, 적발된 위반사항의 실제 시정 여부도 풀어야 할 과제다.
강화된 스프링클러와 외장재 기준을 기존 건축물에 어느 범위까지 적용할지, 영세기업의 자부담 능력을 어떻게 보완할지도 정책의 실효성을 좌우한다. 대규모 조사가 일회성 점검에 그치지 않고 시설 개선과 반복 확인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결국 공장 화재를 줄이는 핵심은 사고 직후의 처벌 수위를 높이는 것만이 아니다"면서 "위험물을 줄이고, 불이 나도 번지지 않는 구조를 만들며, 노동자가 경보를 듣고 즉시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게 핵심"이라고 조언했다.
정부의 이번 대책이 ‘안전은 비용’이라는 제조현장의 오랜 인식을 ‘안전은 생산과 공급망을 지키는 경쟁력’으로 바꾸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