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증기 전술’이 쿠팡 물류센터, 초대형 참사 막았다

물→수증기 부피 1700배 팽창 원리로 산소 차단·냉각효과
물 분사→수증기 발생→공간의 열 흡수→연소 조건 약화
건물 내부에 소방대원 투입 않고 화재 진압 효과 거둬

한국재난안전뉴스 박종열 기자 |
 

큰불이 잡히고 잔불 정리 작업에 들어간 인천의 쿠팡물류센터 화재는 8층 규모에 랙(rack) 방식 복층 구조, 좁은 통로 등 복잡한 내부 구조로 인해 소방대원들이 진입하기가 어려웠다.

 

이같은 상황에서 소방당국이 사용한 ‘전술’이 있다. 국제적으로 사용되는 ‘환기 제어 및 수증기 질식·냉각 전술’이라는 것이다. 붕괴 가능성까지 제기됐던 물류센터 화재를 큰 인명피해 없이 진화하는 데 성공한 것은 이 전술 덕분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22일 인천소방본부에 따르면 지난 18일 오전 6시 54분께 지상 8층, 연면적 29만9천㎡ 규모의 쿠팡 32물류센터에서 불이 나자 소방 당국은 화마에 맞서 싸울 전술로 이 ‘수증기 전술’을 선택했다.

 

이 전술은 불타는 건물 내부에 호스로 쏟아부은 물이 고온의 열을 받아 수증기로 변할 때 부피가 약 1700배 팽창하는 원리를 활용하는 게 핵심이다. 수증기가 팽창하면 물류센터 내 산소 농도가 급격히 낮아져 불길의 화력을 낮출 수 있다.

 

게다가 물이 수증기로 변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강력한 열 흡수 효과로 창고 내부의 폭발적인 화재 확산을 막고 저온 연소(훈소)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소방당국은 화재 현장인 물류센터 6층과 7층으로 소방대원을 직접 투입하지 않고 물류센터 건물 외벽 환기구와 파괴된 외벽 틈새 등 뚫린 공간(개구부)에 고가·굴절차와 헬기 등을 이용해 집중적으로 물을 뿌렸다.

 

인근 8개 시도의 인력과 장비를 동원하는 국가소방동원령에 따라 화재 현장에 출동한 많은 고가·굴절차들이 이 작전을 수행했다.

 

이 전술이 효과를 내면서 물류센터 6층에서 7층으로 번진 화재는 다행히 리튬배터리를 탑재한 로봇 수백 대(전기차 20대 분량)가 있는 물류센터 5층으로는 확산하지 않았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만약 화재가 5층으로 확산했다면 리튬배터리 연소에 따른 열폭주 현상으로 인근 SK인천석유화학 공장까지 영향을 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번 화재로는 소방관 2명이 각각 연기 호흡과 탈진으로 병원 치료를 받은 것 이외에 다른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2021년 쿠팡 덕평물류센터 화재에서는 진화에 나선 소방관이 순직했다.

 

 

◇‘환기 제어 및 수증기 질식·냉각 전술’이란?

 

핵심은 환기(산소 공급)를 통제하면서 물의 냉각 효과와 수증기 발생 효과를 함께 이용해 화재의 열과 연소 조건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활용되는 화재진압 방식이다.

 

소방용 물은 세 가지 방식으로 불을 약화시킨다. 우선 물은 열을 빼앗는다. 물방울이 뜨거운 연기와 화염 속에서 가열되고 증발할 때 상당한 열을 흡수한다. 즉, 뜨거운 화재 공간→물방울이 열 흡수→물이 수증기로 변함→온도 하락이라는 과정이다.

 

화재 진압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냉각이다.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도 물의 화재 진압 효과로 연료 냉각, 화염 냉각, 산소 농도 감소, 복사열 감소 등을 제시하고 있다.

 

물을 아주 작은 물방울 형태로 분사하면 뜨거운 공간에서 빠르게 증발한다. 물은 액체 상태에서 기체인 수증기로 변하면서 부피가 크게 늘어나기 때문에, 화재 공간의 일부를 수증기가 차지하게 된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산소 농도가 낮아지고, 가연성 연소가스의 농도도 희석된다.

 

따라서 원리상으로는 물 분사→수증기 발생→공간의 열 흡수 및 가스 희석→연소 조건 약화로 이어진다.

 

그런데 ‘수증기’만을 믿고 물을 많이 뿌리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다. 특히 밀폐된 건물에소방대원이 진입해 있을 경우, 물을 잘못 분사하면 생성된 뜨거운 수증기가 소방대원에게 증기 화상을 입힐 수 있다.

 

또 잘못된 물 분사는 뜨거운 연기층을 아래로 밀어낼 수 있다. 건물 내부 화재에서는 천장 아래에 고온의 연기와 가연성 가스가 층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이때 물을 잘못된 방식으로 분사하면 연기와 뜨거운 공기의 흐름을 변화시켜 오히려 소방대원이나 피난자의 위치로 고온 가스를 밀어낼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또 하나의 핵심이 ‘환기 제어(Ventilation Control)’다. 화재는 산소가 계속 공급되면 커진다. 외부 공기가 파손된 창문이나 벽으로 들어오면 화재가 확대된다.

 

따라서 소방대가 화재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문과 창문을 무작정 열거나 환기시설을 가동하면, 외부 산소가 대량으로 유입될 수 있다. 특히 건물 내부에 산소가 부족한 상태에서 뜨거운 가연성 가스가 축적되어 있는 경우에는 갑작스러운 산소 유입이 백드래프트(backdraft)를 일으킬 위험도 있다.

 

그래서 기본적인 전술은 우선 환기구와 개구부를 통제한 후에, 물을 이용해 고온의 연기와 화재 공간을 냉각하고, 화재가 약화된 뒤 필요한 환기를 실시하고, 화점에 직접 물을 공급해 완전히 진압하는 방식이다.

 

핵심을 정리하면 ‘환기 제어 및 수증기 질식·냉각 전술’은 건물의 공기 흐름과 산소 공급을 통제하면서, 물을 미세하게 분사해 화재의 열을 빼앗고 일부를 수증기로 전환시켜 고온 가스와 연소 조건을 냉각·희석하는 전술이다.

 

다만 ‘물을 많이 뿌려 수증기로 불을 질식시키는 전술’이라고 단순화하면 안 된다. 실제로는 냉각이 주된 효과이고, 수증기에 의한 산소 희석과 환기 통제가 보조적으로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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