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재난안전뉴스 박광춘 기자 |
마치 폭주하는 두 기차처럼 마주보면 달려가던 미국과 이란이 전쟁 발발 109일만에 마침내 멈추는 데 합의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과의 합의가 “완성됐다”고 선언했고, 셰바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는 오는 19일 스위스에서 종전 양해각서, MOU 서명식이 열릴 것이라고 밝혔다. 전쟁의 불씨였던 호르무즈 해협도 다시 열릴 전망이다. 국제유가는 즉각 하락했고, 금융시장은 중동 확전 공포가 한풀 꺾였다는 신호를 먼저 반영했다.
하지만 이번 합의가 곧바로 ‘평화’를 뜻하는 것일까. 일단 총성은 멈출 수 있지만, 전쟁을 부른 핵심 쟁점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란의 핵 프로그램, 미국의 제재, 동결자산 해제, 이스라엘의 군사행동, 이란의 미사일과 역내 무장세력 지원 문제는 모두 후속 협상으로 넘겨졌다. 이번 합의는 종전의 문을 연 사건이지만, 동시에 불안한 60일 협상의 시작이기도 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14일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이란 이슬람공화국과의 딜은 이제 완성됐다”며 “모두에게 축하를 보낸다”고 썼다. 이어 “호르무즈 해협의 통행료 없는 개방을 승인하고, 미국의 해상 봉쇄도 즉각 해제한다”며 “세계의 배들이여, 엔진을 켜라. 석유가 흐르게 하라”고 했다. 전쟁과 봉쇄, 유가 급등으로 이어졌던 중동 위기가 일단 '외교의 영역'으로 돌아선 순간이었다.
파키스탄도 거의 동시에 같은 내용을 확인했다. 샤리프 총리는 “집중적인 협상 끝에 미국과 이란 사이의 평화 합의가 도달했다”며 “양측은 레바논을 포함한 모든 전선에서 군사작전을 즉각적이고 영구적으로 종료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서명식이 19일 스위스에서 열릴 예정이며, 그 전까지 ‘사전 이행 협의’가 진행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란 최고국가안보회의 사무국도 반관영 타스님 통신을 통해 합의 내용을 확인했다. 사무국은 합의에 따라 당사자 간 모든 전쟁 행위가 “오늘 밤부터 즉각적이고 영구적으로” 중단되고, 미국의 해상 봉쇄도 해제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이란 측은 미국이 MOU상 약속을 먼저 이행해야 최종 합의를 위한 협상이 시작될 수 있다는 조건도 분명히 했다.
전쟁은 멈추지만, 핵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번 합의의 가장 큰 의미는 미국과 이란이 직접 충돌하던 전쟁을 멈추기로 했다는 점이다. 전쟁은 지난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이란 공습, 그리고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사망 이후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4월 한 차례 휴전이 이뤄졌지만, 호르무즈 해협 문제와 양측의 산발적 공격으로 정전은 사실상 흔들려 왔다.
호르무즈 해협은 이번 전쟁의 경제적 뇌관이었다. 전쟁 전 세계 원유의 약 20%가 이 좁은 해상 통로를 지났다. 이란이 해협을 막고, 미국이 이란 항만을 겨냥한 해상 봉쇄에 들어가면서 유가는 치솟았다. 전쟁은 군사 충돌을 넘어 세계 경제의 물가와 에너지 안보를 흔드는 위기로 번졌다.
그런 점에서 호르무즈 재개방은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이란에도 절실했다. 미국은 유가 급등과 해상 봉쇄 장기화 부담을 덜 수 있고, 이란은 원유 수출과 외화 확보의 숨통을 틔울 수 있다. 합의 발표 직후 미국산 원유 가격은 배럴당 80달러 수준까지 떨어졌고, 브렌트유도 83달러 안팎으로 내려갔다. 다만 전쟁 이후 유가가 여전히 높은 수준이라는 점에서 시장은 ‘전쟁 종료’보다 ‘위험 프리미엄 일부 해소’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그러나 전쟁을 멈추는 것과 핵 문제를 푸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 과정에서 줄곧 “이란은 핵무기를 가질 수 없다”고 강조해 왔다. 이번 양해각서(MOU) 초안에도 이란이 핵확산금지조약, 핵무기 비보유 의무를 재확인하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핵무기 개발 포기 선언만으로 핵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관건은 검증이다. 이란이 보유한 농축우라늄을 어떻게 처리할지, 농축시설을 얼마나 제한할지, 국제원자력기구,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어느 범위까지 허용할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와 IAEA 이사회 결의는 어떻게 정리할지 등이 모두 남아 있다. NBC뉴스가 전한 이란 국영 메흐르뉴스 보도에 따르면 최종 협상은 60일 동안 진행되며, 핵무기 개발 문제와 남은 제재, 유엔·IAEA 결의가 핵심 의제가 될 전망이다.
즉 이번 MOU는 ‘핵 문제 해결’이라기보다 ‘핵 문제를 다시 협상할 수 있는 전쟁 중단 장치’에 가깝다. 총성은 멈췄지만, 핵은 남아 있는 셈이다.
제재 완화와 동결자산.. 이란이 원한 ‘실익’
이란이 합의에 응한 배경에는 경제적 압박이 있다. 전쟁 장기화와 해상 봉쇄는 이란의 원유 수출을 막았고, 금융 제재는 외화 유입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초안에는 일부 석유·금융 제재 해제, 미국과 동맹국의 전후 재건계획 제출, 동결자산 해제 등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란 매체 보도에 따르면 협상 기간 중 약 240억 달러 규모의 이란 자금이 동결 해제될 수 있으며, 이 중 절반은 최종 협상이 시작되기 전에 풀릴 가능성도 거론됐다. 트럼프 대통령과 이란 당국은 앞서 동결자산 해제 문제를 놓고 충돌한 바 있다. 이란 입장에서는 ‘핵무기 비보유’ 원칙을 다시 확인하는 대신, 제재 완화와 자산 해제를 통해 실질적 보상을 얻어야 하는 구조다.
MOU 초안의 14번째 항목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최종 합의는 일부 자금 동결 해제, 석유 제재 중단, 이란 항만을 향한 미국 해상 봉쇄 해제 같은 약속이 이행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내용이다. 또 다른 조항에는 봉쇄 해제와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이 30일 안에 이뤄진다는 내용도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도 계산이 있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유가와 물가 부담은 커지고, 중동에 미군을 계속 묶어둬야 하는 비용도 늘어난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 봉쇄는 미국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경제에도 타격을 준다. 트럼프 대통령이 “석유가 흐르게 하라”고 한 것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이번 합의의 핵심 동력이 에너지 시장 안정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말이다.
빠진 의제가 더 위험하다
이번 합의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들어간 내용만이 아니다. 빠진 내용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최종 합의의 범위는 이란의 농축 활동, 제재 완화, 전후 재건 문제로 제한될 가능성이 크다. 반면 이란의 미사일 프로그램과 이른바 ‘저항 세력’ 지원 문제는 본격 의제에서 빠진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이런 점이 불안한 대목이다. 이란에게 탄도미사일과 역내 무장세력 네트워크는 체제 방어의 핵심 수단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 문제를 전면적으로 협상 테이블에 올렸다면 합의 자체가 무산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일단 전쟁을 멈추기 위해 가장 어려운 의제를 뒤로 미룬 셈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르게 볼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란 핵 문제뿐 아니라 헤즈볼라, 시리아, 가자, 레바논 전선 전체가 안보 위협이다. 실제 이스라엘군은 합의가 임박한 상황에서도 베이루트 남부 교외의 헤즈볼라 목표물을 공격했고, 레바논 민방위 당국은 이 공격으로 3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스라엘의 베이루트 공습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소셜미디어에 “이란과의 평화 합의에 매우 가까워진 특별한 날에 베이루트 공습은 일어나서는 안 됐다”며 “모든 당사자는 물러서야 한다. 이스라엘은 레바논 어디에서도 더 이상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순순히 물러설지는 불투명하다. 이스라엘 카츠 국방장관은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함께 “분명한 정책”을 이끌고 있다며, 이스라엘군은 레바논과 가자, 시리아에서 장악한 지역에 '무기한' 남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란이 레바논 내 이스라엘 작전에 대응해 공격할 경우 보복하겠다고도 경고했다. 종전 합의가 이스라엘의 안보 우려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면, 중동의 평화는 다시 작은 충돌 하나로 흔들릴 수 있다는 얘기다.
“새로운 장”이라는 밴스 미국 부통령, “평화의 환경” 기대한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국제사회는 일단 환영했다. JD 밴스 미국 부통령은 폭스뉴스에서 서명식 참석 문제를 두고 “나는 분명히 갈 계획이지만, 대통령 본인이 갈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합의를 “새로운 장”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지나친 낙관은 경계했다. 밴스 부통령은 “모두가 내일 당장 함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며 “평화의 방식을 배우는 데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오늘 밤 우리는 매우 중대한 첫걸음을 뗐다”고 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도 “전 세계가 오랫동안 필요로 해온 이 소식이 우리 지역에 지속적인 평화와 안보 환경을 구축하는 길을 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밝혔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미국과 이란이 ‘평화 합의’에 도달한 것을 축하하며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향한 중대한 조치”라고 평가했다.
카타르 외무부도 이번 합의를 “지속 가능한 평화와 경제 성장을 공고히 하는 중요한 단계”라고 환영했다. 카타르 중재단은 테헤란에서 17시간에 걸친 집중 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주 도하에서 양측과 별도 준비회의가 열리고, 스위스 서명 이후 기술 협상이 시작될 전망이다.
유럽도 호르무즈 재개방에 무게를 뒀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제한이나 통행료 없는 해상 교통의 재개는 지역 안정과 세계 경제를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밝혔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도 중동 긴장 완화와 세계 경제 충격 완화 측면에서 이번 합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미국 공화당 내부에서도 지지 발언이 나왔다. 제임스 랭크퍼드 공화당 상원의원은 “47년 동안 이란은 미국과 우리의 동맹, 그리고 역내 미국인을 공격해 왔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합의를 치켜세웠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이번 합의는 외교적 성과이자 정치적 자산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합의 불구, 전쟁의 대가는 너무 컸다
이번 합의가 반가운 이유는 전쟁의 대가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미국 기반 인권단체 하라나(HRANA)는 지난 2월 말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이란 공습 이후 이란에서만 3,600명 이상이 숨졌고, 이 가운데 1,700명 이상이 민간인이라고 집계했다. 레바논에서는 3,700명 이상이 숨졌고, 걸프 국가에서도 36명이 사망했다. 이스라엘에서는 20명이 숨졌으며, 미군 13명도 전투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비전투 사망자 2명도 있었다.
경제적으로 전세계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영향을 미쳤다. 전세계 주가는 급락했고, 유가는 급등했고, 물가는 석유 관련 견인효과로 적지 않게 올랐다. 이른 공급 견인 인플레가 촉발된 것이다.
19일 스위스 서명은 끝이 아니라 시작
이번 종전 MOU는 전쟁을 끝내는 문서이지만, 평화를 보장하는 문서는 아니다. 미국과 이란은 전쟁을 멈추는 데는 합의했지만, 왜 전쟁이 시작됐는지에 대한 답은 아직 내놓지 못했다. 핵을 어떻게 검증할지, 제재를 어느 수준까지 풀지, 이란의 미사일과 헤즈볼라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 이스라엘을 어떤 방식으로 묶어둘지는 모두 남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의 배들이여, 엔진을 켜라”고 했다. 해협은 다시 열릴 수 있다. 석유도 다시 흐를 수 있다. 그러나 중동의 평화가 흐르려면 원유보다 먼저 신뢰가 흘러야 한다. 그리고 그 신뢰는 선언이 아니라 검증, 이행, 자제로 만들어진다.
19일 스위스 서명식은 역사적 장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장면이 종전의 마침표가 될지, 불안한 휴전의 쉼표가 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총성은 멈췄지만 핵은 남아있는 이번 종전이 어떻게 마무리될지는 여전히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